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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의 역설

백선엽 — 다부동의 명장과 간도특설대의 중위, 한 사람 안의 두 얼굴

2020년 7월 15일 · 대전(국립대전현충원)

주장

전쟁 영웅을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 백선엽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졌을 것이고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은

전쟁에서의 전공과 식민지 시기 행적은 별개의 사실이다. 정부가 2009년 특별법에 근거해 공식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을 "매도"라 부르는 것은, 그 결정의 법적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하는 것이 매도가 아니라 정확한 역사 서술이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은 1941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에 입교해 1942년 소위로 임관했고, 1943년 2월부터 광복까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 일대 조선인 항일 무장세력 토벌을 전담한 부대로, 그 잔혹성이 여러 증언과 연구로 확인돼 있다. 종전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다.

광복 후 백선엽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린다. 소련군 진주를 피해 월남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를 지휘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32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랐다. 다부동 전투는 실제로는 1사단과 미 27연대(마이켈리스 대령)의 협동 방어전이었고 — 1사단은 좌우 고지를, 미군은 도로·계곡 축선을 맡았다 — 그 전공의 규모를 두고도 논란이 있다: 예비역 장군 박경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출신 서상문 박사 등은 백선엽이 그 연구소 자문위원장을 30여 년간 지내며 자신의 전공을 과장했다고 비판하는 반면, 1사단이 한때 단독으로 북한군 3개 사단급 공세를 상대했다는 반론도 있다. 이후 육군참모총장, 연합참모본부총장, 주중대사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명단에 이름이 오른 것도, 6·25 전쟁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같은 한 사람이다. 2020년 7월 사망 당시 유족의 신청에 따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정부는 서울현충원이 이미 만장 상태였기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전쟁 영웅을 제1현충원이 아닌 곳에 홀대했다"는 반발이, 진보 진영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는 "친일 행적자가 국립묘지에 묻힌 것 자체가 문제"라는 반발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안장 다음 날 대전현충원 홈페이지 안장자 정보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가 하루 지연 게재였다는 논란을 낳았고, 이 문구는 2023년 보훈부에 의해 다시 비공개 처리됐다.

백선엽 신격화를 주도한 보수 언론에 대한 비판도, 그 신격화에 맞서 온전히 친일파로만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론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이 사안의 실제 지형이다. 전쟁에서의 공(功)과 식민지 시기의 행적을 뭉뚱그리지 않고 각각의 사실로 남겨두는 것 — 그것이 이 인물을 다루는 유일하게 정직한 방법일 것이다.

출처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2 (백선엽 결정이유서) — 2009 자료
  • 국립현충원이 뭐길래… 20년 전부터 이어진 안장 논란 — 한국일보 · 2020
  • 백선엽/사건사고 및 논란 (박경석·서상문 비판 및 반론) — 나무위키 웹